[오수록 수사의 글] 허정虛靜의 자리로 되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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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본래 마음먹은 곳으로부터 ‘멀리 왔다’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본 궤도를 이탈한 것은 아니지만 멀리 와 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낙담하게 되지요. 『주역』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을 귀띔해 줍니다. “멀리 가지 않아 (곧) 돌아올 것이니, 많이 변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 것이다, 크게 길(吉)하리라[不遠復 无袛悔 元吉]”(『주역』복괘). 살면서 살피고 챙겨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마음 챙기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람살이에 흉허물이 없을 수 없습니다. 흉허물이 있을 때마다 뉘우치고 고쳐가야 합니다. 수행자의 도(道)는 자기의 불선(不善)을 재빨리 알아차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야 흉허물이 적습니다. 알아차리면 고치게 되고 고치면 즉시 선(善)이 회복됩니다. 노자도 『도덕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지극히 허(虛)하고 정(靜)한 자리에 있게 하라. 만물이 일어남이 그 자리 복(復)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존재자들이 무수하나 모두 각각 그 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뿌리 두고 있음을 정(靜)이라 하니. 이를 복에 따른다 하여 복명(復命)이라 한다. 복명을 상(常)이라고도 하니 상을 알면 지혜로울 수 있으나, 상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잘못을 저지른다. 상을 알면 두루 품어 안을 수 있고, 두루 품어 안을 수 있는 것은 공평함이니, 공평함이 왕이요, 왕은 곧 하늘이요, 하늘은 곧 도(道)요, 도는 무궁함이라 다할 날이 없는 것이다(『도덕경』16장).
『주역』복괘(復卦)에서는 “복(復)에서 천지(天地)의 마음을 볼 수 있다[復見天地之心]”하였고, 노자『도덕경』 16장에서는 “만물이 생겨남이 복(復)에 있음을 볼 수 있다[萬物竝作 吾以觀復]” 하였습니다. 복은 이른바 허정(虛靜)의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비고 고요한 곳’에서 어떻게 천지의 마음을 보고, 어떻게 만물이 생겨남을 본다는 것입니까. 말하자면 복은 아무것도 없는 자리임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자리는 아닙니다. 즉 분별되기 전, 갈라지기 전, 존재자의 자리이기 때문에 무어라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의 자리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습니다, 시간도 공간도 없는 자리이기에 어떤 분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시간이 생겨나고 공간이 생겨납니다. 노자는 “만물병작”(萬物竝作)이라 하였으니, 그 자리에 처한 것이 도(道)입니다. 그러기에 자신도 거기에 처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오이관복”(吾以觀復)입니다.
허(虛)하면서 정(靜)한 것이 사람의 본래 마음입니다. 그런데 때론 사람의 생각이 복잡하여 마음이 산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을 텅 비우[虛]고 고요[靜]에 들어보라’고 노자는 말합니다. 분주함 속에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고요에 듭니다. 일은 멈추었지만 생각은 여전히 떴다 가라앉았다 합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몸이 자연스레 이완되면서 이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낍니다.
‘고요에 든다’는 것은 본원으로 돌아가 본성(本性)을 본다는 것입니다, 본성을 관상하면서 본연의 선(善)을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주석가인 왕필(王弼)은 “복명(復命)하면 성명(性命)의 상(常)을 얻는다” 했습니다. 복명은 본원으로 회귀하여 다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나뭇잎이 떨어져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때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정(靜)이라 하고 정하게 되면 명(命)을 회복한다’ 말합니다.
왕필은 “상(常)이라는 것은 편애하지 아니하고, 뚜렷하지도 아니하며, 밝거나 어두운 모습이거나 따뜻하거나 시원하다는 상(象)이 없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상(常)을 알아야 밝습니다, 밝으면 만물을 포용할 수 있고, 포용할 수 있으면 광대하고 공평하게 됩니다, 하늘은 선(善)한 사람에게나 불선(不善)한 사람에게나 고르고 공평하게 햇살을 드리웁니다. 사람 마음이 허정(虛靜)해서 광대하고 공평함에 이르면 하늘과 하나 됩니다, 하늘과 사람이 하나됨을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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